고대 학자들은 문학상의 관념이 박약했다. 혹은 일파는 문학을 의젓한 경술(經術)의 외용물 곧 도학(道學)의 말류(末流)로 놓아두니, 최자(崔滋)· 마인순(馬麟淳)들이요, 또 혹은 문학을 일종 기술로 놓아두어 너무 숭상할 필요가 없다 하니, 이수광(李睟光)·이정귀(李廷龜)등의 설이다. 그렇듯 옛사람은 연문학(軟文學)을 중심잡고 인정의 기미를 묘사한 작품은 대수롭지 않게 친다. 그런 까닭으로 가요(歌謠)를 도외시한 투습이 있어 잡동산이(雜同散異)나 비리(鄙俚)의 물건으로 치고 말았으니, 다시 말하면, 첫째는 조선어로 지은 것은 비리하다 하여 등한히 볼뿐더러 짐짓 한자로 반역(反譯)하여 본색을 고친 것이 많으니, 『고려사』 악지(樂志)의 예가 그것이요, 둘째는 고인이 가요를 지을 때는 각 문집에 산견(散見)한 것처럼 한풍(漢風)의 악부식(樂府式)을 닮아 한시(漢詩)의 모습을 흉내내었으나, 그 역시 언어상 관계로 한의 악부체에는 비슷하지도 않게 지어 용두사미의 가조(歌操)가 되고 마니, 이는 이종준(李宗準)의 「유산악부서(遺山樂府序)」와 신흠(申欽)의 『상촌집(象村集)』에도 설파한 것이다. 셋째로 음악은 대체상 일종의 의식물(儀式物)로만 간주하였다. 그러므로 웬만한 경문학(硬文學)의 재료가 될 만한 것이 있어도 그만 한만한 단속으로 인하여 흐지부지 다 없어진 것이다.
속내가 그러하므로 오늘날 우리들이 고래의 가요를 조사함에 있어서는 끔찍이 생소하여 그 진면을 엿보기가 삭막하다.
그렇듯 재료가 희귀하고 사실(史實)이 공소한 가요를 연구하는 일은 참말로 힘이 미치지 못하는 일이 되어 논문을 쓰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위의 기술한 것과 같이 가요는 문화사의 가장 중대한 재료인 까닭으로 연구자는 어디까지든지 노력을 가하여 발견 정리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내가 일찍부터 가시(歌詩)를 강구(講究)하여 봄은 실상 진력하여 온 터이나 아직까지도 완전히 투득(透得)하였다는 자신이 없다. 그러나 진보는 계단이 있고 거창한 사업은 여럿의 힘을 요구하는 것이다. 불초의 지금까지 연구한 바가 비록 미완성품에 불과한 것이나 그것을 세상에 발표하여 문예가 여러분에게 참고가 되게 하면 혹시 진보 성취에 한 도움이 될까 하여 이번에 이를 간략히 기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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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공유마당